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이지리아 내전 (문단 편집) == 그 외 == 국제 구호 활동의 최전선에 나서던 [[적십자]]는 당시 교전 지역에 함부로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운 데다 자칫 비아프라 측에 대한 구호 활동이 정치적 지지로 보일 수 있는 상황에 제대로 된 구호 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다. 이러한 적십자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몇몇 의사들이 뜻을 모아 극한의 상황에서도 의료 - 구호 활동을 펼치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그게 바로 '''[[국경 없는 의사회]]'''다. '''비아프라 전쟁으로 인해 [[서양]]에 처음으로 아프리카라는 곳이 빈민과 고난의 지역이라는 [[영 좋지 않은]]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.''' 비아프라 정부는 처음에는 '[[기독교]] 국가'나 '문명 국가' 등의 선전을 통해 아프리카의 [[이스라엘]]이라는 이미지로 서양에 이 전쟁을 알리려 했으나 효과가 없자 대신 인도주의적 고비로 서방에 알리려고 했다. 특히 [[홀로코스트]]의 이미지를 가져다 쓰면서 도덕적 자본(moral capital)을 사용해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결국 이 전쟁이 '일방적인 [[학살]]'이 아닌 '정치적 내전'이라고 결론을 내린 서방 국가들은 차갑게 비아프라 정부에게 등을 돌렸다. [[홀로코스트]] 같은 '절대적인 악'이 아닌 정치적 내분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비아프라 정부는 모든 정치적 대의명분과 신용을 잃었던 것이다.[* 프랑스와 포르투갈 등 비아프라를 지원했던 나라들도 패망 직전에는 지원을 끊어 버리거나 지원 물자 규모를 축소해 버렸다.] 또 [[민족자결주의]]로 많은 [[제3세계]] 국가들에게 호의를 얻으려 했으나 민족자결주의는 반식민주의 사상까지만 허용되는 범위였다.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이 내전 개입에 나이지리아라는 국가의 주권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 나이지리아를 지원했거나 침묵했다.[* 사실 이는 대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이 나이지리아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. 제국주의 시대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민족, 언어, 종교, 문화 등 다양한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편리에 맞게 식민지 지역에 경계선을 긋고 행정구역을 나눠 대립과 분열을 부추기며 [[식민 지배]]를 하다가 [[제2차 세계 대전]] 이후 그대로 독립시켰다.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아프리카와 [[중동]], [[남아시아]] [[동남아시아]] 국가들의 [[내전]]과 [[전쟁]], 영토, 종교, 민족 분쟁 등의 원인은 대부분 이 때문이다.] 마지막으로 인간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[[인도주의]]적 주장들은 국제사회의 엄격한 힘의 논리에는 낄 자리가 없었다. [[아프리카]]와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갔고 나이지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지만 국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. 물론 나이지리아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혹했던 비극이라서 백과사전이나 일부 서적에서 서술되기도 하지만 이 전쟁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. 주로 미국 언론을 통해 소식이 전파되고 이를 받아서 보도하던 60년대 한국 언론[*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정치 사회 보도를 독재정권이 통제했기 때문에 60년대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 언론은 국제면 비중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.] 덕에 나이 든 사람들은 간혹 '비아프라'라는 이름 정도는 기억하지만 정확하게는 거의 잘 모른다. [[먼나라 이웃나라]] 구판에 아프리카 내부 문제와 엮여서 등장한다. [[나이지리아군]]은 이 전쟁 당시 [[MiG-17]]과 [[Il-28]]을 사용했다. 남아공, [[호주]], 프랑스, 소련 등지에서 온 용병 파일럿들이 조종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